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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속보도-1]“주님의 평화”...‘백수(白壽)’맞은 윤공희 대주교의 ‘삶과 신앙’

김선균 | 2022/08/23 14:34

윤공희 대주교가 1950년 3월 21일 사제품을 받은 이튿날 첫 미사를 주례하는 모습

◀ANN▶
(광주가톨릭평화방송) 김선균 기자 = 천주교광주대교구 제7대 교구장을 지낸 윤공희 대주교가 올해로 99세인 ‘백수(白壽)’를 맞았습니다.
 
광주가톨릭평화방송은 한국 천주교 주교 가운데 최초로 백수를 맞은 윤공희 대주교의 ‘삶과 신앙’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해 앞으로 5차례에 걸쳐 연속 보도를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순서로 김선균 기자가 윤공희 대주교의 생애를 돌아봤습니다.
 
◀리포트▶
윤공희 대주교는 일제치하의 혹독한 찬바람이 불던 지난 1924년 11월 8일 평안남도 진남포시 용정리에서 본당 일을 돕던 아버지 윤 상 베드로씨와 시장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던 어머니 최상숙 빅토리아씨 사이에 4남 1녀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윤 대주교의 집은 성당근처에 있었고, 특히 본당 일을 열심히 돕던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천주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 같은 분위기는 훗날 윤 대주교가 사제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윤 대주교는 1946년 3월 함경남도 덕원신학교에서 철학과와 신학과를 마치고 부제가 됐습니다.
 
당시 정치적·이념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에게 사제품을 줄 주교가 공산정권에 의해 모두 납치되자 남한에 내려가 사제품을 받으라는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듬해인 1950년, 초대 원주교구장을 지낸 자신의 신학교 동기이자 세 살 위였던 故(고) 지학순 주교와 함께 월남을 하게 됩니다.
 
1950년 3월 20일.
 
서울 가톨릭대학교 전신인 성신대학에서 못다 한 공부를 마치고 故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꿈에 그리던 사제품을 받게 됩니다.
 
윤 대주교는 서품과 함께 1950년 4월부터 서울 명동성당에서 보좌신부로 사목하던 중 그해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6.25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잠시 내려온 윤 대주교는 부산 UN포로수용소에서 종군신부를 맡았고 전쟁이 끝난 1954년에는 부산 가톨릭도서관 부관장을 거쳐 서울 성신중·고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습니다.
 
공부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윤공희 대주교는 1956년 9월 로마 유학길에 올라 로마 울바노대학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특히, 그는 1960년 로마 그레고리안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으며 말 그대로 ‘공부벌레’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윤 대주교는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총무를 맡아 한국 천주교의 실무를 총괄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63년 10월 7일.

교황청으로부터 수원교구장에 임명된 데 이어, 같은 해 10월 20일 주교품을 받았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만 39살.
 
한국 천주교는 젊은 주교의 탄생에 많은 찬사와 함께 큰 기대를 하게 됩니다.
 
윤공희 대주교의 모습

1963년 12월 21일 초대 수원교구장에 오른 그는 1967년 3월 24일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겸임하도록 교황청으로부터 사명을 받습니다.
 
故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하기 전인 1968년 4월까지 1년 동안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수행했습니다.
 
윤 대주교는 수원교구장 재임 당시인 1967년 4월부터 1970년 10월까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임시의장을 거쳐 1975년 3월까지 주교회의 부의장을 지냈습니다.
 
천주교광주대교구와의 인연은 지난 1973년 10월 25일 대주교로 승품됨과 동시에 광주대교구장으로 착좌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윤 대주교는 교구장으로 재임할 당시 대외적으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와 사회주교위원회 위원장, 성직주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무엇보다 윤 대주교가 교구장으로 취임할 당시 40여명에 불과하던 교구 사제는 200여명으로 늘었고, 8만여명에 불과하던 신자도 30만명으로 불어나는 등 교세가 급격히 변화했습니다.

윤 대주교는 1980년 5․18민중항쟁을 겪으면서 광주대교구를 움직이는 대주교로서, 광주의 어른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겪었던 암울한 당시 사건이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했습니다.
 
하지만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 방문을 이끌어 냈고 특히 첫 지역 방문지로 교황을 광주에 모신 일은 자신을 가장 흥분시켰던 일로 꼽았습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 방문을 이끌어 냈고 특히 첫 지역 방문지로 교황을 광주에 모신 일은 자신을 가장 흥분시켰던 일로 꼽았다. 

그는 지난 2000년 11월 30일.
 
마침내 교구장으로서 등에 지고 있던 무거운 십자가를 내려놓습니다.
 
광주대교구장에 취임한지 27년만이었습니다.
 
광주대교구장 착좌 당시 49살 중년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는 한 세기에서 딱 1년을 남긴 올해 99세로 사목 일선에서 물러난 뒤 평범한 사제로서의 삶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오는 11월 ‘백수(白壽)’를 맞는 윤공희 대주교의 온화한 미소는 많은 신자들에게 잔잔한 감동과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cpbc뉴스 김선균입니다.

<저작권자(c)광주가톨릭평화방송,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작성일 : 2022-08-19 16:42:03     최종수정일 : 2022-08-23 14:3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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